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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 역사전쟁영화

by 단지only 2024.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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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만 봐서는 온라인 게임과 같은 느낌이었기에, 역사에 기반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묵직함이 나올 줄 모르고 영화관에 들어갔기에 나올 때는 더 숙연해진 영화였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관저였던 청와대 앞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찬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지만 죽음에 관련된 일화 정도만 알려져 있었는데, 명량을 통해서 위태로운 전장의 수장으로서의 고뇌와 결단력,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감동적이었습니다. 백성을, 국민을 대신하여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리더들에게 명량에 나타난 이순신 장군의 애민정신이 귀감이 되면 좋겠습니다. 

 

 

1. 줄거리

임진왜란 발발 6년차, 오랜 전쟁을 끝내고자 왜의 수군이 전라도 땅으로 이동하여 육군과 합류한 후 조선의 한양으로 진군한다는 첩보에 이순신 장군(최민식)은 고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이 됩니다.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순수한 무장이었기에 모함을 받아 고문을 당하고 전장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들마저 먼저 보낸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번에도 전쟁을 글로만 배운 왕과 대신들은 왜군이 330척의 배로 침략해 온다는 소식에 바다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수군들을 육군으로 합류시켜 대응하라 명령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이 뭍에 올라오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대응책을 고심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순신에 불만을 가진 한 장수가 마지막 희망이었던 거북선을 불태우고,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다른 장군들과 병사들은 무의미한 싸움이라며 병영을 철수하고 육군으로 합류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에 돌아갈 곳은 없다며 남은 처소를 모두 불태우는 이순신.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각오로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합니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다의 지형을 자세히 살핀 이순신은 바닷물이 울면서 돌아나가는 울돌목(명량 해협)에서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명량해협에 승부수를 던집니다. 한편 왜군 진영에서도 분열이 있으니 정통 해군 와키자카(조진웅)과 해적이었다가 용병으로 고용된 구루지마(류승룡)의 갈등이었습니다. 구루지마는 자신이 살핀 물길로 봤을 때 아침 일찍 명량해협의 조류를 타면 그날 안에 전라도에 내려 육군과 합류한 후 한양까지 진격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으나, 이전의 전투에서 익히 이순신이라는 용장을 겪었던 와키자키는 이순신 몰래 진도 외해로 빠져 한양을 기습한 후 이순신을 공격하자고 합니다. 

결전의 날, 시작부터 겁을 먹고 물러서는 다른 함선과는 달리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를 이용하여 화포를 쏴서 구루지마의 1군을 격파합니다. 구루지마 2군에 의해 이순신의 대장선이 포위당했으나 이순신은 조란탄을 이용하여 왜군의 많은 병력을 공격하고 갑판 아래쪽 문을 열어 모든 포를 집중시켜 왜선을 날려버립니다. 이를 보고 뒤로 물러서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 두 척도 진군하여 대장선에 합류합니다. 정오가 다가오자 조류의 흐름이 바뀌어 울돌목 근처에 회오리가 발생하자 그제서야 구루지마는 이순신이 해류가 잔잔한 피섬 근처에 버티고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구루지마가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조선인 포로를 태운 자폭선을 보내자, 자폭선에 탄 이순신의 탐망꾼 임준영(진구)은 피섬으로 피신하여 초조하게 전투를 지켜보던 아내 정씨 여인(이정현)에게 이순신 군에게 자폭선의 존재를 알려달라고 수화를 보냅니다. 자폭선이 대장선에 도달하기 전에 폭파하게 되면 자신의 남편이 죽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남편의 대의를 저버릴 수 없었던 정씨 여인은 치마를 벗어 조선 수군의 눈을 끌려하고 이에 함께 피신해 있던 조선 백성들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옷을 흔듭니다. 이에 김응함이 자폭선을 발견하고 자폭선이 대장선에 닿기 전에 처리합니다. 구루지마는 직접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대장선으로 월선하고 적이든 아군이든 앞을 막는 건 다 처리하며 오직 이순신을 향해서만 나아가던 중 조선군의 화살세례를 받고 끝내 이순신에게 참수당합니다. 구루지마의 대장선뿐 아니라 일본 본대도 철사를 연결하여 일자진을 펼친 조선의 판옥선들과 충돌한 후 속수무책 격파 당하자 도도와 퇴각 명령을 내리고, 이렇게 명량해전은 조선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들 이회(권율)은 아버지 이순신에게 전투에서 울돌목의 회오리와 자폭선을 알려준 백성들 중에 어떤 것이 천행이었는지를 묻고 이순신은 망설임 없이 백성이라 대답합니다. 

 

2. 이순신의 명언들

1)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2) 두려움은...필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나타날 수가 있다. 저들도 지난 6년 동안 나에게 줄곧 당해온 두려움이 분명 남아 있기 때문이다. 

3)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4)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5) 만약 그 두려움을...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말이다. 

6)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따라야 하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 

 

3. 역사 속 명량대첩

명량 해전으로도 불리는 명량 대첩은 1597년 10월 25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이 일본의 대규모 함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선조는 이전의 전투에서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이순신을 복권시켜 왜함에 맞서게 하였으나, 지난 칠전량 해전의 대패로 대부분의 장병과 전선을 잃은 조선 수군에게 남은 건 고작 12척의 전선뿐이었습니다. 선조는 이에 수군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수군 정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1597년 10월 24일, 200척의 대함대를 보유한 왜군이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로 서진 후 육군과 합류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진을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이동합니다. 이순신은 이 날 장명들에게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명량해협은 수심이 얕고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며 빠른 조류가 흘렀습니다. 하지만 왜의 해군들은 해적 출신들로 구성되었기에 순류에 맞춰 빠르게 명량 해협을 지나가 육군에 합류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였습니다. 명량 해협으로 접근한 왜함의 규모에 조선 수군의 사기는 저하되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탑승한 군함은 물러섬 없이 자리를 지키며 자군의 함대를 수호하였습니다. 전투 중 적장 마다시가 조선군에 의해 참수되자 사기가 떨어진 왜군은 정오가 되어 조류가 바뀌자 급한 역류 속에서 선회도 하지 못한 채 불리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순신의 지시로 만들어진 300kg의 철선에 왜의 군선들은 속수무책 파손되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왜의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가 부상을 당하고 본대가 큰 피해를 입으며 오후 5시~7시경 물살이 느려진 틈을 이용하여 전군 철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침몰하거나 대파된 왜의 함선은 320여 척이었다고 합니다. 열세 속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과 백성을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 덕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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