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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역사 속 양녕대군와 충녕대군(세종)

by 단지only 2025.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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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VING 홈페이지>

 

충녕대군: 어마마마, 참으로 한양은 넓지 않습니까?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원경: 넓다 하였느냐? 어째서?

충녕대군: 가득 찬 백성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백성, 가축을 키우는 백성, 굶는 백성,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 웃는 백성, 우는 백성

원경: (너는...군왕이 되고 싶은 게로구나...)

 

가장 진행이 빠른 거처럼 느껴졌던 10화. 세자인 양녕대군의 기행과 방탕함에 실망하던 원경은 충녕대군에게서 군주의 모습을 봅니다. 11화 예고에 보니 원경이 태종에게 폐세자를 얘기하던데 진짜일까요??

 

역사적으로는 태종이 폐세자를 언급했고 원경이 반대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인 세자가 되자 폐세자의 운명을 예측한 원경왕후는 매우 슬퍼하며, 폐세자 된 양녕을 멀리 내치지 말고 가까운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하네요. 

 

어렸을 때 위인전에는 똑똑하고 어진 충녕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맏이인 양녕대군은 미친 척을 하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하였다 되어 있었는데 역사적으로는 충녕을 세자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출처: TVING 홈페이지>

 

양녕대군은 기본적으로 여자문제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궁 안팎에서 기생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백성의 딸을 강탈하거나 신하인 중추부사 곽정의 첩을 도덕질하여 궁궐에 들이고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과 사통 하는 등 군주가 아닌 일반인의 기준에서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또한 글공부에 관심이 없고 방탕하게 사는 것에 대해 훈계하는 태종의 권위에도 도전하며 '전하께서는 수많은 여자를 궁궐에 들이시면서 왜 저는 한 명도 못 들이게 하십니까'라는 상소를 올렸다니 폐세자가 문제가 아니라 참수 당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충녕대군을 험담하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어렸을 때 위인전에 나왔듯 세자자리를 양보하기 위한 기행이라 볼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이러한 기행을 일삼던 양녕대군은 결국 1418년 폐세자 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되었는데, 이를 반대한 황희 등 원로대신들도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 세종이 즉위한 후 추방령을 풀어줬는데, 이후 세종의 손자인 어린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가서 죽임을 당할 때도 왕실의 어른으로써 단종을 보호할 생각이 없이 세조의 편에 서 있었다니 폐세자 된 게 천만 다행인 거 같습니다. 

 

<출처: TVING 홈페이지>

 

충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3째 아들로, 모두가 알고 있듯 한글창제의 위인인 세종대왕입니다. 방탕한 큰 형 양녕대군의 폐위가 눈에 보이고 작은 형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하여 왕위에 관심이 없으니 본인이 왕이 되리라 생각한 충녕대군은 원경왕후가 본 대로 '왕이 되고 싶어'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태종에게 잘 보이며 신하들에게 인심을 얻은 케이스입니다. 점점 태종과 신하들이 세자를 비난하고 충녕대군을 옹호하자 충녕은 양녕대군의 기행에 대해 대놓고 비판했는데, 자신의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 하는 거냐고 꾸짖고 새 옷을 장만했다 자랑하는 형에게 마음을 좀 갈고닦으라 충고까지 합니다. 태종 18년(1418)에 양녕대군이 폐세자 된 후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자로 세우겠다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의 반발로 충녕대군이 세자책봉을 받게 됩니다. 항상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힘썼던 충녕은 왕위에 올라서도 우리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며 한글 창제 및 여러 실리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태종이 조금이라도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모두 죽여 없앴기에 충녕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며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세종대왕은 백성에게는 위대한 군주였으나, 태종의 핏줄이기 때문인지 자신의 왕후인 소헌왕후에게는 그닥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외척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태종이 며느리인 소헌왕후의 집안도 역모에 엮어 몰락시켰는데, 세종은 태종의 사후에도 본인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소헌왕후 친정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게다가 여성편력도 심해서 후궁이 10명이고 많은 궁녀들을 가까이 하였다고 하니... 기존의 왕권강화를 이룬 카리스마 태종에 대해 원경을 보며 인간적으로 느낀 실망이, 조선 역사상 가장 성군이라던 세종에 대한 인간적인 실망으로까지 이어지는 슬픈 날입니다.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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